신평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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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평은 후한 말 원소를 섬긴 인물로, 원소가 기주를 차지한 후 임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곽도, 순심 등과 함께 원소의 세력에서 활동하며 관도대전 이후 심배를 실각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원소 사후, 원담과 원상 간의 후계 다툼에서 원담을 지지하며 곽도와 함께 조조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신평의 가족은 원상 측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신평은 이후 기록에서 사라졌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원담을 따르다 조조에게 항복을 거부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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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평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신평 |
한자 | 辛評 |
자 | 중치 (仲治) |
출생지 | 예주 하남성 |
사망 시기 | 미상 |
형제 | 신비 |
직업 | 관료 |
생애 | |
섬긴 세력 | 원소 |
주요 활동 | 관도 대전에서 저수와 대립 |
인물 평가 | 간사하고 아첨에 능한 인물로 평가됨 |
가족 관계 | |
형제 | 신비 |
2. 생애
신평은 후한 말, 원소를 섬겼던 인물이다. 영천군 양책현(陽翟縣, 현재의 위저우시) 출신으로, 그의 조상은 딩시시 출신이었으나, 후한 광무제의 건무 연간(25–56년)에 영천군으로 이주했다.[2]
191년경, 원소가 한복에게서 기주를 양도받을 때 순심, 곽도와 함께 한복을 설득하여 기주를 원소에게 넘기도록 하였다.[10] 이때 임관한 것으로 추정되며, 조조의 모사 곽가와는 같은 현 출신이고, 동료 곽도·순심 및 조조의 모사 순욱과는 같은 군 출신이다.
200년, 관도 대전에서 원소가 패배한 후, 심배가 맹대와 장기의 참언을 받자 곽도 등과 함께 이를 두둔하였으나, 심배는 봉기의 변호로 유임되었다.
202년 원소가 후계자를 명확히 지명하지 않고 사망하자, 원담과 가까이 지내던 신평과 곽도는 원담을 후계자로 내세웠다. 그러나 심배와 봉기는 원상을 추대하였고, 원담은 이에 불복해 거기장군(車騎將軍)을 자칭하며 원씨 가문에 내분이 일어났다.
203년, 신평은 곽도와 함께 심배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이유로 원담에게 원상을 먼저 공격하도록 부추겼다. 그러나 원담은 원상의 반격을 받고 평원으로 쫓겨났으며, 원담의 부하 왕수는 "흉신(凶臣)들을 베고 형제와 화해하십시오"라고 간언했는데, 여기서 "흉신"은 곽도와 신평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11]
이후 신평의 행적은 역사 기록에서 명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204년 업 전투에서 심배가 원씨 가문의 몰락에 대한 책임을 물어 신평의 가족을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다.[9] 신평 본인의 생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2. 1. 초기 활동
초평 2년(191년) 전후, 원소가 한복에게서 기주를 양도받을 때 순심, 곽도 등과 함께 한복을 설득하여 기주를 원소에게 넘기도록 하였다.[10] 이때 임관한 것으로 추정되며, 조조의 모사 곽가와는 같은 현 출신이고, 동료 곽도·순심 및 조조의 모사 순욱과는 같은 군 출신이다.건안 5년(200년), 관도대전에서 원소가 패배한 후, 심배가 맹대와 장기의 참언을 받자 곽도 등과 함께 이를 두둔하여 심배를 실각시키려 하였으나, 심배는 봉기의 변호로 유임되었다.
건안 7년(202년) 여름, 원소가 후계자를 명확히 지명하지 않고 사망하자, 원담과 가까이 지내던 신평과 곽도는 원담을 후계자로 내세웠다. 그러나 심배와 봉기는 원상을 추대하였고, 원담은 이에 불복해 거기장군(車騎將軍)을 자칭하며 원씨 가문에 내분이 일어났다.
203년, 신평은 곽도와 함께 심배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이유로 원담에게 원상을 먼저 공격하도록 부추겼다. 그러나 원담은 원상의 반격을 받고 평원으로 쫓겨났으며, 원담의 부하 왕수는 "흉신(凶臣)들을 베고 형제와 화해하십시오"라고 간언했는데, 여기서 "흉신"은 곽도와 신평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11]
2. 2. 관도대전 전후
200년, 원소가 조조와의 관도 대전에서 패배한 후, 심배가 맹대와 장기에게 참언을 받자, 곽도와 함께 이들을 두둔하여 심배를 실각시키려 하였으나, 심배는 봉기의 변호로 유임되었다.[4]202년, 원소가 후계자를 명확히 지명하지 않고 사망하자, 원소의 두 아들 원담과 원상 사이에 후계 다툼이 벌어졌다. 이때 신평과 곽도는 원담을 지지하였고, 심배와 봉기는 원상을 지지하여 원씨 가문은 분열되었다.[5]
203년, 원상이 평원에서 원담을 공격하자, 곽도는 원담에게 조조와 연합하여 원상에 대항할 것을 조언하였다. 원담은 이를 받아들여 신평의 동생 신비를 조조에게 사자로 보냈다.[6][7]
원담과 원상의 갈등 초기에 신평의 가족은 원상의 본거지인 업에 남아 있었는데, 이후 원상은 신씨 일족을 체포하여 투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04년, 업 전투에서 조조의 군대가 업의 방어선을 돌파하자, 심배는 원씨 가문의 몰락에 대한 책임을 물어 신씨 일족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업이 함락된 후, 신비는 가족을 구하려 했으나 이미 모두 사망한 뒤였다.[9]
신평이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는지는 역사 기록에 명확히 언급되지 않았다.
2. 3. 원소 사후 내분
200년, 관도 대전에서 원소가 조조에게 패배한 후, 심배가 맹대와 장기에게 참언을 받자, 곽도 등과 함께 이들을 두둔하여 심배를 실각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심배는 봉기의 변호로 유임되었다.[4]202년 5월, 원소가 후계자를 명확히 지명하지 않고 사망하면서 원담과 원상 사이에 후계 다툼이 벌어졌다.[5] 심배와 봉기는 원상을 지지하여 예성을 장악하도록 도왔고, 신평과 곽도는 평원군에 근거지를 둔 원담을 지지했다.[5] 이로 인해 원씨 가문은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203년, 신평은 곽도와 함께 심배에 대한 개인적인 적개심을 이유로 원담에게 원상을 먼저 공격할 것을 부추겼다.[11] 그러나 원담은 원상에게 반격당해 평원으로 쫓겨났다.
2. 4. 조조와의 관계 및 최후
원소가 한복에게서 기주를 양도받은 191년 전후에 등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조군의 곽가는 같은 현 출신이며, 동료인 곽도나 순심, 조조군의 순욱 등과는 같은 군 출신이다.[1]신평이 원소 진영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200년의 관도 대전에서 원소가 패배한 이후이다. 전투 후에 심배가 맹대·장기의 참언을 받자 신평은 곽도와 함께 맹대 등을 지지하여 일시적으로 심배를 실각시켰다. 그러나 심배는 봉기의 변호를 받아 간신히 복권했다.
202년 여름, 원소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채 사망하자, 신평과 곽도는 장남인 원담을 후계자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신평과 곽도가 권력을 잡는 것을 두려워한 심배와 봉기는 원소 생전의 총애를 근거로 셋째 아들인 원상을 강제로 후계자로 옹립했다(『후한서』 원소열전에 따르면 원소의 유명을 위조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원씨 가문 내에서 내분이 발발했다.
203년, 신평은 곽도와 함께 심배에 대한 개인적인 적개심을 동기로 원담에게 원상에 대한 선제 공격을 부추겨 이를 실행하게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원담은 원상군에게 반격을 받아 평원으로 쫓겨났다. 또한 원담군의 왕수는 간신[11]을 베어 원상과 화해할 것을 설득했다.
이후 신평 본인의 행적은 사서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으며, 그의 가족의 동향이 기록되어 있다. 평원에 몰린 원담은 곽도의 진언에 따라 조조에게 일시적으로 항복하는 것이 묘책이라고 생각하고, 곽도의 추천으로 신평의 동생 신비를 사자로 조조의 진영에 보냈다. 그 결과 화목은 인정되었지만, 신비는 그대로 조조의 신하로 남게 되었다.
204년 2월, 원상 군의 심배가 업을 지키게 되자, 심배는 곽도와 신씨 형제에 대한 원한을 품고, 성 안에 남아 있던 세 가족을 체포하려 했다. 이때 곽도와 신비의 가족은 무사히 탈출했지만, 신평의 가족은 수감되었다. 신평의 가족은 심배가 조조군과의 농성전을 벌이던 중에 모두 처형되었다. 심배가 결국 패배하여 조조군에게 사로잡히자, 신비는 심배의 처형을 강하게 원했고, 이를 조조가 받아들였다.
205년 정월, 원담과 곽도는 남피에서 조조에게 공격받아 멸망했다. 그러나 이 시점까지 신평이 원담 등과 운명을 함께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며, 그 이전, 남피 전투가 시작될 당시의 생사조차 사서에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신평은 본래 한복의 막료였다.[1]
200년 조조에 대한 대책을 논할 때 순심과 함께 단기 결전을 주장하였다.[1]
원씨 가문의 내분 때에는 사서에 나온 대로 원담을 따랐다. 남피전투 때까지 원담을 따랐으나, 전황이 불리해지자 원담의 명령으로 항복 사자로 조조에게 갔다.[1] 그러나 조조는 항복을 거절하고 신평에게 신비처럼 자신의 편으로 올 것을 권했다.[1] 신평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성으로 돌아온 후 원담은 신평이 조조와 내통했을 것으로 의심하였다.[1] 이에 충격을 받은 신평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여 죽었다.[1]
중국중앙텔레비전의 드라마 『삼국지연의』에서는, 신평이 죽기 직전 심배에게 유언하여, 동생 신비가 기주를 공격하면 자신의 일족을 몰살해 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묘사된다. 심배에게 그 유언을 들은 신비는 절규하며 쓰러진다.[1]
4. 친족 관계
5. 평가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고, 이전 단계에서도 내용이 작성되지 않았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Houhanshu
[5]
서적
Yingxiong Ji
[6]
서적
Sanguozhi
[7]
서적
Yingxiong Ji
[8]
서적
Sanguozhi
[9]
서적
Xianxian Xingzhuang
[10]
서적
資治通鑑
[1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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